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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장준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②

by 소벌도ㄹI 2023.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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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1918~1975)은 확고한 독립정신을 갖고, 독립전쟁이라는 대의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대장정을 감행한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장준하

 

 

일본군 '자원입대' 이후 한국광복군으로 활동

 

1) 일본군 소속으로 중국행

일제는 패망을 앞두고 조선 청년들을 강제징용하는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징용영장을 발급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준하는 평양의 일본군 제42부대에 입영한다. 1944년 1월 20일이었다. 

장준하는 애초 탈영 및 중국으로의 망명을 위해 일본군에 자원입대했다. 입영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환송연에서 "나는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해서 꼭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겠습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배경이다. 오른손 엄지에 동상이 걸리는 심한 부상으로 고생했지만 훈련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결국 훈련소를 수료하고 관동군 부대로 전출, 중국으로 파병된다.

 

2) 세 동지와 결행한 치밀한 탈출

장준하는 적절한 때를 노려 탈출을 계획했고 먼저 상관의 신임을 얻는다. 내무반장 우에다 군조에게 "부대 내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차별에 격분해 탈출을 하려했지만 우에다 같은 좋은 고참병들의 정이 떠올라 포기하였다"고 고백하며 환심을 산다. 이처럼 선임의 하에 장준하는 중국내 부대의 위치, 전체 일본군의 분포 현황 등 정보를 용이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1944년 7월 7일. 장준하, 김영록, 혹석훈, 윤경빈은 계획대로 일본군을 탈출한다. 이 날은 '지나사변' 7주년되는 날로 일왕은 부대에 거하게 술과 담배를 내렸었다. 거하게 취한 일본군 부대의 허술한 틈을 타 3미터 높이의 철조망을 넘어간다. 이후 함께 탈영한 3명의 동지와 미리 약속해놓은 장소에 이른 장준하는 크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변심하지 않고 장소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좌측부터  노능서 ,  김준엽 ,  장준하

 

 3) 생사를 오가며 중국군에 편입, 그리고 중경으로 

 일본군을 탈영해 길을 나선 7월은 무더운 땡볕이 기승을 부렸다. 이와 함께 끊임없는 굶주림은 이들을 매우 힘들게 했다. 언제 어디서 일본군에 발각될지 모르는 우려가 함께했다. 행군에 함께한 홍석훈이 실신하기도 했고 일군이 수색에 동원한 중국인들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또 일본 추격군에 쫓기며 황급히 도주하는 급박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네 명의 일행은 모두 중국 중앙군 소속 한치륭 사령관 휘하 유격대에 합류한다. 이곳에는 이미 일본군에서 탈출한 김준엽이 있었다. 한치륭 장군은 조선 청년들을 융숭히 대접하고 이들의 용감한 탈출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항일전선에 있던 팔로군의 기습으로 한치륭 장군이 전사하고 휘하 부대가 후퇴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며 장준하는 중국 내 국공합작이 피상적 수준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몸소 실감한다. 하릴없이 시간을 축내는 게 안타까웠던 장준하와 그의 일행은 결국 중경으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한치륭 장군이 전사하기 전 이미 상의했던 내용이었다. 생존한 참모장의 동의와 배려 아래, 중국인 안내인과 함께 장준하와 일행은 중경으로 향한다. 1944년 7월 28일, 중국 대륙의 찜통 더위 속 6000리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4)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있는 임천(臨泉)에 체류

장준하 일행은 끝이없는 중국 벌판을 걸었다. 철로 근처의 일본군 경계지구를 지나갈 때는 특히 힘들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중국 유격대가 장준하 일행을 하대하고 모멸했다. 하지만 결국 무사히 임천에 도착했고, 이곳에 이미 와있던 80여 명의 한국청년 군인들이 장준하 일행을 맞았다. 이때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학규 주임과도 인사를 나눈다. 장준하 일행은 이곳에서 훈련과 강의를 들었고 대원들과 교양지 '등불'을 2호까지 제작, 발행한다.

부대 생활은 열악했다. 장준하는 당시 식사를 "국이란 것이 멀건 소금국으로 시래기 몇 오라기가 떠다닐 뿐 들여다보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고 회상한 바 있다. 열악한 상황속을 견뎌낸 장준하 일행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대의를 이루고자 다시 중경행을 결심한다. 김학규 주임의 허락하에이들은 다시 중경으로 향한다.

한국광복군  대원들 (1939년 4월 4일)

 

5) 대장정의 끝, 태극기 휘날리는 중경에 도착

 1944년 11월 21일. 장준하 일행은 중경으로 향하는 여정에 오른다. 학도병 25명, 여성 6명, 아이 3명을 포함해 53명으로 구성된 일행이었다. 장준하는 "밤 두어 점이나 되었을까. 내 몸의 2/3 이상이 이미 내 몸이 아닌 동태였다. 나의 의식은 분명히 내 체구의 1/3 부분 안에서만 작용하는 것 같았다."라고 회고한, 실로 지옥같은 추위에 맞선 대장정이었다.

추위는 물론이고 일본군에 노출될 위험, 중국인 도적떼로부터의 위협도 도사리고 있었다. 위기와 고비를 넘고 넘어, 파촉령을 온전히 넘은 끝에, 꿈에 그리던 중경에 도착한다. 1945년 1월 31일. 일본군을 탈출한지 7개월 만이었다. 중경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장준하 일행은 감격에 겨웠고, 사선을 넘어 중경 임시정부를 찾은 청년들을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반기고 또 반겼다. 임시정부 청사에서 환영식을 갖고, 장준하와 일행은 광복군 군복을 지급받으며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에 편입된다.

 

1944년 초의 장준하(26세 무렵)

 

6)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는 OSS(미국 전략첩보대) 요원에 합류

장준하는 이곳에서 광복군 참모장 겸 제2지대장으로 활동하던 철기 이범석 장군과 조우한다. 평소 장준하고 이름으로만 듣고 흠모하던 인물이었고, 이범석 장군 역시 "젊은이를 전선에 나가 죽게 하라"는 구호를 외치는 청년들에게 존경을 표하던 차였다.

이범석 장군은 장준하에게 중경을 떠나 서안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광복군 제2지대가 미국 OSS부대와 합작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곳이었다. 장준하는 단번에 승낙했다. 김구 주석 역시 "만일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곳에서 진실한 위국의 길이 열릴 것이다."라고 응답하며 서안행을 수락한다.

 

7) '떳떳한 승리의 군대'가 될 무렵, 갑자기 맞은 광복

1945년 4월 29일. 장준하와 일행 50여 명은 청사를 떠나 서안으로 향했다. 김구 주석은 "여러분의 젊음이 부럽소. 젊음이. 반드시 훈련이 끝나기 전에 한번 서안에 가볼 생각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청년들을 배웅했다. 장준하는 이때를 "무엇인가 자꾸 목구멍으로 넘쳐 넘어가는 슬픔이 미처 다 빠지지 못하고 입으로 새어 나왔다"고 표현했다.

장준하는 서안에서 미국 OSS부대와 함께 훈련하며 어엿한 광복군으로 성장해 나갔다. OSS부대는 미국 첩보부대 CIA의 전신되는 조직이었다. 4~7명이 1개조로 구성되었고 장준하는 경인지역 책임자를 맡았다.

훈련이 이어지던 찰나, 국제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광복군이 독자적인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해 왔지만 물거품이 될 상황에 처했다. 광복군의 한반도 진격은 향후 최소한의 외교적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외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작전을 결국 실행되지 못했고, 일왕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장준하는 "떳떳한 승리의 군대로 조국에 개선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국내 치안을 주도해 보려던 꿈이 잠들고 말았다.'고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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