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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장준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③

by 소벌도ㄹI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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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1918~1975)은 확고한 독립정신을 갖고, 독립전쟁이라는 대의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대장정을 감행한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장준하

 

1) 해방된 조국으로 귀국

1945년 11월 23일. 장준하는 귀국 비행기에 올라 김포 비행장에 도착한다. 해방 후 백범 김구의 비서로 일했고 1946년 5월에는 철기 이범석 장군이 주도하는 조선민족청년단 교무처장으로 일한다. 이로 인해 '족청계'로 분류되었으나 이내 관계가 소원해졌고 1949년 2월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에 편입해 학교를 졸업한다. (1993년 한신대는 졸업생 중 모교를 빛낸 인물에게 수여하는 제 1회 한신상 수상자로 장준하를 선정하기도 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가 암살당하고 1년 뒤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이때 모친과 할아버지, 첫째 딸을 잃는다. 동생은 실종된 뒤 생사를 모르게 된다. 가족이 풍비박산나는 역경 속에서도 1952년 9월 피난지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을 창간한다. 1년 뒤인 1953년 4월에는 정식으로 '사상계'를 발행하기 시작한다. 만 35살 무렵이었다. 사상계는 이내 대한민국 최고의 잡지로 자리매김한다. 

국내 정진군(좌측 네번째부터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 한사람 건너 이범석 )




 

2) 막사이사이상 수상, 언론인 겸 정치인으로 자리매김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에는 사상계가 9만 7000부 발행되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발행부수가 8만 부였으니, 가히 기록적인 잡지였다. 장준하는 1962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화 부문의 수상자로 선정된다. 같은 해 봉사부문 수상자는 마더 테레사 수녀였으니 장준하 수상이 미친 파장은 매우 컸다.

장준하는 1967년 국회의원(서울 동대문구 을)에 당선된다. 국방위원회에서 일했고 당시 장준하는 '양심적인 군인들이 이 나라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믿었다. 월남전 한국군 총사련관 채명신 장군, 훗날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하는 김재규 장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채명신 장군이 훗날 "만약 장준하 선생이 대통령을 입후보했다고 하면 나는 정치를 모르고, 정치는 하지도 않았고, 정치라는 건 나와 완전히 담쌓고 있지만... 그런 분이 대통령에 출마했다고 하면 정말 맨발로 뛰어다니면서라도 운동하고 싶은 그런 입장이었을 거에요."라고 발언할 정도로, 장준하는 주변 군인들의 신뢰를 얻었다. 실제로 그는 군인 복지에 매우 신경썼고 "국방 예산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군에 많은 관심을 쏟은 정치인이었다. '군인'신분으로 중국대륙을 건너며 독립운동을 했던 이력 때문일테다.

 

3) 반정부 투쟁, 민주화운동 중 의문사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에 맞서 정권의 민낯을 파헤치고 드러내는 등 민주화 운동에 가담한다. 군사정권은 그런 장준하를 14년 동안 세 번 구속, 서른 일곱 번 연행한다.

그럼에도 장준하의 활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한다. 유신헌법 개정운동을 주도하던 와중이었다.  공식 발표는 '단순 실족사'였다.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장준하의 생은 그렇게 마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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