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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장준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①

by 소벌도ㄹI 202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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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장준하 선생(1918~1975)은 확고한 독립정신을 갖고, 독립전쟁이라는 대의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대륙에서 대장정을 감행한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장준하

 

일본군에 강제징집되기 전까지의 생애

 

1) 유년기 : 기독교 신앙심과 배일(排日)의식을 가지고 성장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아버지 장석인 목사, 어머니 김경문 여사의 4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장준하가 태어난 평북 의주는 북방관문으로 일찍이 주민들이 신문명을 접하고 수용한 진취적 기상이 강한 곳이었다. 애국자와 선각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천주교와 개신교가 유입되는 통로로 기독교 신자가 많았다. 장준하 역시 할아버지 장윤희와 아버지 장석인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2) 청소년기 : 일제 탄압속에서 항일운동과 계몽운동에 가담

 장준하는 중학교 1학년 무렵 장준하는 할아버지가 보던 신문을 통해 브나로드운동(농촌계몽, 문맹퇴치) 관련 포스터를 접하고 운동에 참가한다. 마을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웠는데 이 일로 일본 순사의 심문을 받았는데 이는 일제에 적개심과 반항심을 갖는 계기가 된다.

숭실중학교를 1년 다닌 후 신성중학교로 전학했고 신성중학교 시절 역사와 신앙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는 소양을 갖춘다.

신성중학교 재학 중 장준하는 함석헌을 찾는다. 그는 모르는 게 없어 평안도 지역 학생들에게 '함도깨비'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오산학교 교사였다. 함석헌이라는 존재를 깊이 각인하게 되었고 훗날 사상계를 발행하며 함석헌에게 글을 부탁하기도 한다. 장준하의 일생에서 함석헌은 스승이자 동지였다.1937년 장준하가 졸업반이던 무렵 일본은 중일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전시체제 강화에 나서면서 반일지식인 검거에 나선다. 단오를 맞아 선천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는데 대회 직후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장리옥 교장을 붙잡아간다.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였다. 이를 지켜본 장준하와 학생들은 일제경찰에 맞섰지만 소수의 학생으로는 무장한 이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다음날 장준하는 전교생을 이끌고 동맹시위를 벌이고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을 주도한다. 이 사건으로 장준하는 처음으로 일경에 붙잡혔고 경찰서에 유치된다. 

 

3)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 3년간 재직

1938년 3월 25일 신성줗악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진학,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려했지만 그 무렵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가 독학을 계획하고 있던 차 정주교회 소속 미션계열 신안소학교에 교사 자리가 마련돼 교사로 부임한다. 장준하가 부임한 신안소학교는 교사(校舍)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장준하는 '학교 교사 신축'에 나선다. 교회와 지역주민들이 감히 엄두를 못내던 일이었다. 

 

4) 일본 유학, 결혼, 그리고 일본군 학도병 입대

장준하는 여전히 목사를 꿈꾸고 있었다. 신정중학교 동기생 김익준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철학과에 진학했고 곧이은 1년 후 일본신학교에 입학한다. 150명 정도의 학생을 수용하고 다른 대학에 비해 신학적 분위기도 안정적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장준하는 훗날 동지가 되는 전택부, 박영출, 문익환, 문동환, 전경연 등을 만난다.

일본에서 유학하는 동안 장준하는 박영출 목사가 조선인 학생을 위해 세운 숭덕학사에 다니면서 신앙생활과 교포 어린이들을 가르친다. 이곳 숭덕학사는 목회와 배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조선 기독교인들의 활동무대였다. 훗날 한국광복군 동지가 되고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낸 김준엽도 이곳에서 만나 처음 연을 맺는다.

1941년 동경유학시절 왼쪽부터 김용묵 김익준 장준하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숭덕학사를 폐지시켰고 장준하는 1943년 11월 하순 귀국한다. 당시는 한국 청년들이 강제징집되던 시기였다. 자신의 입대가 늦어진다면 신사참배 거부로 탄압받던 부친과 가족에게 혹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장준하는 부친과 가족들을 위해 일본군 학병에 지원한다. 나아가 일본 체류 당시 하숙집 딸이자 자신의 제자였던 김희숙과 결혼식도 올린다. 그녀가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갈수는 상황이었다. 일제도 결혼한 여성까지 끌고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1944년 1월 5일, 장준하와 김희숙은 결혼식을 올린다. 일본군에 입대하기 보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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