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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황성기독교청년회(황성YMCA) 간단정리

by 소벌도ㄹI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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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3년 서울에서 창설돼 1913년까지 활동한 기독교 청년단체.

개설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저녁 8시, 서울 유니언 회관(정동 공동 서적실)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탄생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회였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한성을 '황성'이라고 불렀다. 독립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청년회 이름에 차용했다.

게일·헐버트·브로크만·브라운(Brown, G. M.)·터너(Turner, A. B.)·언더우드·밀러(Miller, E. H.)·벙커(Bunker, D. A.)·에비슨(Avison, O. R.)·그레그(Greig, G. A.)·다카기(高木正義) 등 총 5개국 출신 37명(정회원 28명, 준회원 9명)이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초대회장에는 헐버트가 선임되었다. 이사 12명 중 여병현(呂炳鉉)과 김필수(金弼秀)가 조선인으로 참여했다.

 

설립과정

기독교청년회(YMCA)는 1844년 런던에서 최초로 결성돼 1850년대 이후 미국에서 크게 발전한 청년단체다. 

1899년경, 조선의 150여 상류층 청년들이 YMCA 창설을 주장했다. 이들의 요구에 따라 언더우드(Underwood, H. G.), 아펜젤러(Appen-zeller, H. G.) 등 국내 선교사들이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한국 YMCA 창설을 촉구했다.

헐버트(H. B. Hulbert)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 쓴 글에는 당시 상류층 기독교청년들이 민중과 구별되는 특별한 청년단체를 만들고 싶어 했음을 알려준다. 신분에 관한 고정관념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기였고 교리에 대한 자세한 교육을 받지 못한 다른 종교인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일 거리를 쏘다니는 수백 명의 청년들을 본다. 그들은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자극만 있으면 가장 유망한 청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YMCA와 같은 새로운 단체를 바라는 이유로서 첫째, 조선에 들어와 있는 기독교와 교회가 이미 상민이나 천민들에 점령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반 출신인 그들 지식 청년들은 천민과 자리를 함께할 수 없었다. 양반과 상민은 신분차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 둘째, 개화 청년들은 그 당시 정부로부터 위험시당하고 있었다. 독립협회 운동이 모두 개화 청년들에 의해 운영되어 왔고, 그들이 개화다 민족독립이다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일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개화에 뜻을 가진 청년들이라면 위험시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셋째, 청년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이 다시 소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사람들은 자고로 하느님을 믿는 민족으로서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데에 조선인들은 처음부터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넷째, 청년들은 기독교를 통해 민족의 전통신앙의 소생을 의식했다." (『코리아 리뷰(Korea Review)』1903년 4월.)


북미 YMCA국제위원회가 조선 청년들의 요구를 접수한 후  라이언(D. W. Lyon)이 조선 현지를 조사했다. 중국 YMCA 운동을 개척한 인물이다. 1900년 6월 28일부터 9월 17일까지 서울에 머무른 라이언은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조선 YMCA창설을 긍정적으로 보고한다. 북미 YMCA국제위원회는 조선에 파견할 창설 간사로 필립 질렛트(Philip L. Gillet)를 선정했고 회관 건립 예산으로 5천 불을 책정했다. 

1901년 9월 서울에 도착한 질렛트는, 1년간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로 YMCA를 조직하는 등 대한제국 청년들을 사귀었고 중국·홍콩 YMCA와 연결, ‘중국·한국·홍콩 YMCA 전체위원회’를 구성하며 YMCA 창립을 준비했다. 한국 학생 YMCA는 1902년 세계학생기독교연맹에 가입한다.

1903년 3월, 중국, 조선, 홍콩 YMCA 전체위원회 브록크만 총무를 초청해 YMCA 창설준비협의회를 조직했다. 조선 YMCA 창립 의지를 재확인한 후 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이 있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결성됐다.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수업중인 청년들.





회관 건립

황성기독교청년회는 각국 외교관과 실업가를 포섭해 청년회관 건립을 위한 자문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회 모금으로 1904년 종로대로 북쪽 옛 태화궁(太華宮) 자리에 부지를 마련했다. 1905년 개화파 인사였던 현흥택(玄興擇)이 이곳에 맞닿아 있던 부지를 기증했고, 나머지 필요한 부지는 미국 공사 모간(E. W. Morgan)이 기부한 기금으로 마련했다. 

1906년 6월 29일 대지 소유권 등기를 마치고 미국인 부호 워너메이커(J. Wanamaker)가 제공한 건축비를 사용하여 1907년 회관을 신축, 1908년 12월 3일에 개관식을 가졌다. 당시 청년들은 YMCA 회관을 그저 서구식 건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웅장한 3층 서구식 벽돌집이 온 시가를 한눈에 내려다보게 되니 이 집이야말로 이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집입니다.”라는 말은 YMCA 회관이 당시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보여준다. 

YMCA 회관.


활동내용

선교에 주관심을 두었던 외국인 선교사들과 달리 청년회원들은 선교를 넘어서는 교육·계몽·사회 운동에도 목적을 두고 있었다. 사사부(司事部)를 비롯하여 의사부(議事部)·재정부·종교부·교육부·친접부(親接部)·운동부·교사부 등 각종 위원회를 조직해 운영했다.

창립 초기부터 연설회와 토론회를 운영하였다. 1906년 황성기독교청년학관(皇城基督敎靑年學館)을 설치했고 운동회와 사경회(査經會), 환등회(幻燈會) 같은 사업도 실시하였다. 1907~1908년에는 중학과(3년 과정)·일어과(1년)·영어과(2년)·목공과(木工課) 주간 과정이, 일어과·영어과·부기과(簿記課) 야간 과정이 개설됐다. 스포츠와 기술교육, 사진·환등 보급에 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참여인원은 점점 늘어갔다. 1908년에는 회원 1,160명, 학관 학생 222명을 두었다. 종교활동 집회에 참가한 연인원 2만 명, 강연회 등 각종 프로그램 참가자는 연 5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활발한 활동에 황실 역시 지원금을 하사하며 지원했다. 

1906년 이후에는 해외에서도 활동했다. 1906년 조만식(曺晩植) 등이 도쿄에서 결성한 재일본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를 맡기 위해 김정식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7년 4월에는 세계학생기독교연맹 세계대회 참석을 위해 윤치호·김정식·김규식 등이 도쿄를 찾았다. 

당시 활동했던 인물로 이상재·여병현·김필수·윤치호·김규식·김정식·최재학·김린(金麟)·서상륜(徐相崙)·유성준(兪星濬)·이원긍·이익채(李益采)·조남복(趙南復)·홍석후(洪錫厚)·홍재기(洪在箕)·민준호(閔濬鎬)·전덕기(全德基)·김명준(金明濬)·고찬익(高燦益)·김원선(金瑗善)·최병헌(崔炳憲)·육정수·이교승·김종상(金鍾商) 등이 있다.

이 중 이상재(李商在)·김정식(金貞植)·이원긍(李源兢) 등은 독립협회(獨立協會), 개혁당(改革黨)에 관련돼 감옥에 복역한 바 있다. 출옥 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참여했고 단체의 중추적인 소임을 담당하였다.



한계

당시 정치운동을 하고자 하는 조선인이 많았지만 YMCA는 이에 부응하지 못했다. 실제 YMCA를 영국·미국의 보호를 받는 정치단체로 오해하고 입회하는 경우가 많았고 회원이 500명을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게일과 질레트 등이 종교활동으로 국한하자 회원들이 크게 실망했다. 정치성향이 강한 회원들은 을사조약 철회를 위해 YMCA를 이용하려다가 게일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1900년대 적극적으로 국권회복을 지향한 기독교 청년단체,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 등과 대조적인 점이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해체


1910년 8월에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후 일제는 황성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탄압했다. 1911년에 일제가 날조한 소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寺內正毅 總督 暗殺未遂 事件)’은 선교사 및 미국 교회와 깊은 관련을 맺고 활동해온 YMCA 활동 탄압이었다. 윤치호가 체포되었으며 사건을 세계에 폭로한 질레트는 추방당했다. 

일제는 1913년 초 김린·사일환(史一煥)·유일선(柳一宣) 등 친일기독교인을 매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해 황성기독교청년회를 일본 YMCA에 소속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그 결과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913년 4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朝鮮中央基督敎靑年會)로 명칭을 바꾼다. 단체는 약간의 자주성을 유지했으나 일본 YMCA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YMCA는 계속되었지만 황성기독교청년회는 10년 만에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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