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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구식군대 불만이 폭발하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과정 간단정리

by 소벌도ㄹI 2021.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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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서 월급이 한 달만 밀려도 화가 난다. 그런데 13개월이 밀린다면?
13개월 만에 월급을 받았는데 현금이 아니라 컵라면, 김밥 등으로 지급받았다면?

회사를 뒤집어도 몇 번을 뒤집었을 테다.

1882년 6월(음력),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
이를 훗날 '임오군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1876년 11월, 쇄국정책 기조를 펼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한다. 이후 집권한 고종과 민비는 개화정책을 이어나갔다. 이에 개화파 관료가 득세했고 기존 수구 관료들은 세가 위축됐다. 고종과 민비는 개화정책 일환으로 1881년 군제를 개편한다. 기존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개편한다.

몸이 튼튼한 지원자 80명을 뽑아 무위영 소속으로 별기군을 새롭게 창설했다. 별기군은 일본군대가 양성했기 때문에 왜별기라 부르기도 했다. 민비는 왜별기대를 경호부대로 둘 정도로 일본식 신식 군대를 편애했다. 처우는 별기군에 집중됐고 구식군대 소속 군인들 불만은 쌓여 나갔다.

일본 모델을 본떠 만든 신식군대 별기군.

 

 

모래와 겨가 잔뜩 섞인 급료

7월 19일, 조세로 바치는 곡식을 실은 배가 도착했다. 정부 예산을 집행하던 선혜청 담당 민겸호는 도봉소에서 무위영 소속(옛 훈련도감 소속) 군병들에게 밀린 봉급 중 한 달치 급료를 우선 지급하도록 했다. 수개월 만에 한 달치 급료(쌀)를 지급받았지만 양은 턱없이 부족했고 겨와 모레가 잔뜩 섞여있었다. 민겸호 집안 하인이 창고지기로 급료를 지급했는데 사익을 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사람들이 창고지기와 무위영 영관에게 몰매를 퍼부으며 다 뒤집어엎어 버린다. 도봉소사건(都捧所事件)이었다. 이에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 가둔다. 이 중 일부는 사형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민겸호(閔謙鎬)는 흥선대원군의 처남, 고종의 외삼촌, 민비의 친척 오라버니로 민씨 세도를 주도하는 실권자 중 실권자였다. 별기군 창설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군인들은 원통함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우발적 소요, 흥선대원군의 지지 속에서 국가적 사태로 발전

 

소요에 가담한 군병들이 구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큰 호응이 없었다. 심지어 상관인 이경하도 민겸호에게 직접 가보라며 발을 빼버린다. 이판사판이 된 이들은 결국 민겸호의 집을 점령한다. 집에는 보물이 가득했다. "1전이라도 집어가는 자는 죽인다." 군인들은 민겸호 집안의 재물을 마당에 한꺼번에 쌓아놓고 모두 불 지른다. 성난 병사들이 쳐들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민겸호는 가족과 함께 숨었다가 도피했다.

사태가 지경에 이르자 운현궁으로 찾아가 흥선대원군에게 도움을 구했다. 전후 사정을 들은 대원군은 밀린 봉급을 완전히 지급하겠다 약속했다. 군병들은 곧 조직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일부는 무기고를 약탈해 무장했고 포도청에서 동료들을 구했다. 일부는 의금부를 습격해 흥선군 휘하 정치범들을 석방시켰다.

실각했던 대원군은 군인 소요를 빌미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대원군은 민심을 얻기 위해 군병 소요를 위정척사 운동으로 확대시키고자 했다. 대원군 수하와 군병들이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 관원들은 공사관에 불을 질러 기밀문서 등을 모두 불태우고 제물포 항으로 도주했다. 이들은 민씨 일가의 사병과 다름없었던 별기군도 제압했고 별기군 병영 하도감(下都監)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비롯 일본인 열 세 명을 살해하는 등 정변을 조직적으로 전개시켰다.

 

군병들의 불만이 야기한 우발적인 소요사태가 동아시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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