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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일본 시선에서 바라본 임오군란 맥락 초간단 정리

by 소벌도ㄹI 2021.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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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대의 습격을 받은 일본 공사 일행

1882년 구식군대가 일으킨 군란, 임오군란은 민 씨 일가의 부정부패와 신식군대(별기군)와 비교한 차별대우가 원인이었다. 봉기군의 칼날은 별기군 양성을 지원했던 일본으로 향했다. 민비는 별기군을 자기 경호부대로 둘 정도로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봉기군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포위, 공격한다.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공사관에 불을 질러 기밀서류를 태우며 가까스로 탈출, 인천으로 도망친다.

임오군란 과정을 자세히 담은 일본의 다색판화 니시키에(錦繪). 조선인 군인과 백성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는 장면을 그렸다. 조선변보(朝鮮變報)라는 제목을 달았다. 니시키에는 일종이 신문으로 기능했다. 일본의 모습을 영웅적으로 묘사하며 민중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주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인을 ‘폭도(暴徒)’로 묘사했으며 일본 육군중위와 군무사령관 등이 이를 진압하는 모습을 영웅적으로 묘사했다. [서울역사박물관]

다음 날 오후 3시 무렵, 인천부사 정지용과 임시통역관 고영희는 제물포에 도착한 일본공사 일행을 환대하며 휴식처를 내준다. 한성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일행을 쫓던 봉기군이 도착해 대원군의 밀명을 전달한다. 하나부사 일행을 척살하라는 지시였다. 사태를 파악한 인천부사는 군대를 대거 이끌고 공사 일행을 습격한다. 일본 공사일행은 다시 이어진 습격을 뚫고 월미도로 겨우 도주한다. 이 과정에서 6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한다. 공사일행은 하루를 꼬박 새운 뒤 영국 측량선 플라잉 피시(Flyinf Fish)호에 오른다. 조선을 떠난 플라잉 피시호는 3일 후인 7월 29일(음력 6월 15일), 나가사키 항에 도착한다.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하고 있는 일본 공사일행.

 

 

일본, 대규모 병력과 함께 조선행

하나부사 공사는 도착 즉시 외무성에 군변 사실을 알렸다. 부산과 원산도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군함을 파견해 거류민을 보호해야 한다, 서울 정세변화를 살펴야 한다, 조선정부와 교섭하기 위해 강력한 시위 병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하나부사 공사의 전보는 730일 오전 1시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도달했다. 이노우에는 등청하자마자 내각 유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육군경 대리 등과 협의해 긴급각의를 소집한다. 한편, 플라잉 피시(Flying Fish)호는 일본 외무성 속관 2명과 함께 인천으로 돌아간다. 외무성 속관은 조선에서 임오군란 이후 서울 동정과 일본인 피해상황을 파악했다.

조슈 번 출신으로 일본 근대화 작업을 수행했다. 외무경으로 임오군란과 제물포 조약에 관여했다.

일본 정부는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해야한다는 강경파와 담판 교섭을 우선해야 한다는 온건파로 갈렸다. '강경론에 기반하지만 방법은 온건파 의견을 참작한다'는 조정책을 내세워 대조선 대응방침을 결정한다. 외교 담판은 하나부사 공사에게, 군사상 일은 군 지휘관에게 일임했고 육해군 장교를 하나부사 공사와 함께 파견했다. 전권은 이노우에 외무경에게 위임했다. 하나부사 공사일행은 대규모 병력과 함께 다시 제물포를 찾았다. 뒤이어 일본 전 병력이 제물포, 인천에 집결했다. 일본 병력은 니게 카게노리 해군소장 휘하 군함 4, 수송선 3척 및 고도 육군소장 휘하 보병 1개 대대 1,500명 병력이었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제물포조약 체결

하나부사는 청나라가 직접 개입할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인천에 도착해 보니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군 3,000명이 한성에 진주하는 등 청나라는 더 활발히 움직였다. 더해 미국 군함 모노카시(Monocasy)호가 인천에서 일본 측 활동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주청 미공사 영(John Russell Young)이 "조선에 관한 미국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 군함 파견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당시 미국에 요청한 결과였다. 영국 군함 엔카운터(Encounter) 호도 인천에 정박해 일본을 감시, 견제했다. 만약 군사행위를 시행하면 국제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었기에 하나부사는 병력을 통한 점령을 시행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겨우 탈출한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다시 조선을 찾았고 제물포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무력을 직접 행사하진 않았지만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피해보상과 거류민 보호를 내세우며 교섭을 추진했다. 조선정부는 이유원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해 제물포에서 일본과 회담했다회담은 일본 군함 히에이 함상에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이 체결된다.

애초 임오군란 뒤처리를 위한 회담이었지만 조선 내에서 일본이 상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됐고, 공사관 경호를 빌미로 일본 군대를 국내에 주둔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은 제물포조약을 빌미로 약간의 병력이 아닌, 1개 대대를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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