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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개항기 영국의 대한정책

by 소벌도ㄹI 2021.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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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큰 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관심사는 러시아 남진저지, 경제적 이익 추구(무역) 두 가지였다. 영국은 무형(無形)의 제국을 통해 이를 달성코자 했다. 가능한 식민통치 부담을 피하고 통상과 영향력 확대만 추구하는 정책기조로 다른 열강을 자극하지 않고 실질적 식민지화를 꾀하는 방법이다. 영국이 경제력, 수송력, 해군력에서 우위를 점했기에 가능했고, 한편으로는 인도 및 전 세계 각지에 분산돼 있는 영육 군을 더 이상 분산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청나라를 통해 러시아를 간접적으로 견제했고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자국 상인 및 기업에 대한 외교적 지원을 강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나라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은 청일전쟁(1894) 이후 일본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2. 대조선 외교정책, 정관(靜觀)에서 문호개방으로

영국은 1850년대 이래로 늘 조선에 관심을 보였다. 상해에서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영국 제품을 수출하는 간접무역도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영국은 러시아-터키간 전쟁(1877)에도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 등 러시아를 두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영국은 다른 서구열강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경우 뒤이어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가 청나라의 혼란을 틈타 중앙아시아 내 러시아-청나라 국경인 일리지방을 점령하는 일리사건이 발생한다. 러시아와 청나라의 갈등이 격화되자 영국은 러시아의 만주 및 한반도 점령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한다.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Sir Thomas Wade)역시 러시아와 청나라가 전쟁을 벌이면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에 개입할 것이라고 동아시아 정세를 인식했다. 일리사건은 러시아 동아시아 진출의 신호탄이었고 이 즈음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변모 급성장한다. 모두 영국에게 부담이었다. 러시아의 만주 및 한반도 점령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한 영국은 그간 기피해 온 조선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1875년, 일분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를 포격한다.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 문호를 개방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일본은 조선을 개항시켰다.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H. Parkes)는 영국정부에 포함외교를 구사해 거문고를 점령, 영국도 조선과 통상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당시 파크스는 일본보다 조선의 무역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보수당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파크스는 독자적으로 일본에 와 있던 수신사 김기수(金綺秀)와 접촉을 시도했고 조선에 군함을 보내 정찰케 하는 등 관심을 이어갔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3. 영국의 외교정책 기조 변화

18804, 영국에서는 제2차 그래드스톤(Gladstone) 자유당 내각이 출범한다. 그랜빌(Granville)이 다시 한 번 외무장관으로 취임한다. 주일 대리공사 케네디(Kennedy)는 조선에 개국을 열망하는 청년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며 영국정부의 외교정책 변화를 촉구했고 영국은 조선과 외교조약 체결로 정책을 굳힌다. 영국은 청나라에 조선과 영국의 조약 체결에 협조해 줄 수 있는지 확인하는 등 조선과 통상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신중한 태도로 먼저 조선과 미국의 조약체결을 지켜보았다.

영국은 조선과 미국간 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접한다. 천진에 있던 주청 영국공사 웨이드는 이홍장(李鴻章)을 방문해 조선과 교섭을 알선해 주기를 부탁했다. 이홍장은 조미조약 내용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원한다면 협조하겠다고 약속했고 조선에 머물고 있던 마건충(馬建忠)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조미, 조영수교 모두 이홍장의 역할이 컸다. 이홍장이 일본의 세력확장, 러시아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개국을 권했다. 이홍장은 미국, 영국, 독일 등과 같은 서구 열강과 수교를 맺으면 벨기에가 열강 틈에서도 굳건히 독립을 유지하는 것처럼 조선도 나라를 훌륭하게 지탱해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조선 관리 이유원(李裕元)을 설득했다.

영국은 조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4. 영국, 미국에 이어 조선과 조약체결

영국외무성은 한국과의 수교교섭 책임을 아시아 함대 사령관 윌스(Willes)제독에게 맡겼다. 윌스는 고베영사 애스턴(Aston)과 통역 모드(Maude)를 대동하고 군함 비질란트(The Virgilant)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 527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530일에는 조선측 전권대신 조영하(趙寧夏), 부관 김홍집(金弘集), 마건충과 함께 윌스를 찾는다. 조선측은 조약에 속방문제를 삽입하기를 주장했지만 윌스는 본국정부의 훈령이 있어야 한다고 거절했고 번역관이 상해에서 도착하기를 기다려 조문을 정리한 후 조인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65일 갑자기 톈진 주재 프랑스 영사 딜롱(Dillon)이 청국정부 소개장을 갖고 갑자기 조선을 찾는다. 이에 윌스는 프랑스에 뒤질까봐 서둘러 66일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였다.

조약은 앞서 체결한 조미조약 내용과 같았으나(일자불개, 一字不改) 조선의 연해측량권을 추가했다. 앞서 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난파선 구제와 통상을 목적으로 조선과 수교하고자 했지만 영국은 이에 더해 러시아의 한반도침투를 저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국어를 공부 중인 애스턴 고베영사.

 

5. 재협상

영국정부는 이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영국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크스는 한·영조약체결 후 2주만에 이 조약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조잡한 협정이라고 비판했고 조약 내용이 영국에 전해지자 런던 상공회의소는 외무성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 조약내용이 영국의 자유무역 이익을 해친다라고 반대입장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관세율이 영·일조약보다 높다, 통상개항장이 분명하게 명기돼 있지 않아 영국군함의 조선항만 출입이 보장돼 있지 않고 해도작성권도 규정돼 있지 않다, 치외법권 관련 조항, 아편수입 금지는 영국이 일본과 청나라를 상대로 하는 외교와 무역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조선측이 영국여왕의 호칭의 격을 청나라 황제보다 낮게 서게 함으로써 영국 여왕을 모독했다는 점을 재협상 구실로 삼았다.

임오군란 처리문제로 조선정부가 파견한 박영효, 김옥균, 민영익 등 수신사 일행이 일본을 찾는다. 영국은 일본을 찾은 이들과 조약 수정을 위한 협상가능성을 타진했다. 파크스와 아스톤 서기관은 18821016일 민영익과 가진 회담을 시작으로 23, 25일 박영효, 김옥균 등과 연이어 회담을 가졌다.

파크스는 체결한 조약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한다. 이에 박영효는 만일 조약개정을 바란다면 이는 조선과 영국 양국 정부가 직접 논의해야 할 것이라 답했고 영국은 조약수정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조선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서구 열강을 통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오히려 파크스에 역이용 당하는 꼴이 돼버린다.

그 후 주청공사(駐淸公使)로 전임된 파크스는 18831027(927) 전권대신(全權大臣)으로서 서울에 도착하여 조선측 전권대신 민영목과 더불어 협상을 하였다. 이 때 조선측은 청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영국측과 직접 협상하였다. 결국 18831126(1027)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었고, 1884428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병시(金炳始)와 영국 측 전권 파크스 사이에 비준이 교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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