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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드는 정보들

김수영 시인 소개와 <이 거룩한 속물들>

by 소벌도ㄹI 2021.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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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

초기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썼다. 4·19 혁명을 기점으로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강조하는 시를 썼다.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중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다음날 새벽 사망했다. 48세였다.

1981년부터 민음사에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해 수여하고 있다.
2013년 서울시 도봉구는 시인이 생전 거주했던 도봉구 방학동에 시문 및 시학 업적을 기리는 김수영문학관을 설립했다.

아래는 동서춘추 1967년 5월호에 수록된 김수영 시인의 <이 거룩한 속물들> 내용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 들어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일껏 하던 놀음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하다는 말의 <멍석>이 청탁이 되는 예를 글쓰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매일같이, 매달같이 너절한 신문소설과 시시한 글들이 쉴새없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는가.

<속물론(俗物論)>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얄궂은 생각과 쓰디쓴 자조의 미소뿐. 도무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붓이 천근같이 안 움직인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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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리석은 어제의 경험이, 속물론을 쓸 자격을 이미 상실하고 고민하고 지친 나의 머리에, 아주 아득한 옛날의 기억처럼 아물아물 떠오르는 것이 신비스럽기까지도 하다.

이렇게 지나치게 서론이 길어진 것도 역시 속물론을 쓰기 싫은 심정의 서투른 지연작전이라고 생각해 주면 된다. 나를 보고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는 것은 아무개 아버지를 보고 자기가 도둑질을 한 집의 담에 가시철망을 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더 어색한 일이 없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자식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러다가 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 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 있는 책꽂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셀러의 에세이스트로 유명한 A, B, 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파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 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戰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이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 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대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 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 속물이지 고급 속물은 아니다. 고급 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 속물이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 속물을 미화하고 적당화시킴으로써 자기 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고급 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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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속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속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 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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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무대를 바꾸어놓아야 한다. 사회자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자가 서 있는 자리가 나쁘다. () 하지만 일루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더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정도 효과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

우리 친구들 중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유행가를 거의 도맡아 쓰고 있는 친구로 속물을 극복한 위대한 속물이 있다. 신문의 역사소설을 근 10권이나 쓴 선배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 이쯤되면 속물도 애교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나일론 재킷을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고, 어찌나 시간이 걸리는지, 요즘에는 그 감별까지도 포기하고 있다. 이제 나도 진짜 속물이 되어가나 보다.

 


 

아래는 김수영문학관 홈페이지 링크

http://kimsuyoung.dobong.go.kr/

 

김수영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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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uyoung.dobo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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