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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강화도에 해군사관학교가 생긴 이유

by 소벌도ㄹI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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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혼란스러운 대내외 정국 속에서 고종은 근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근대식 군대 양성은 역점사업 중 하나였다. 1882년 신식군대 별기군 창설이 임오군란으로 좌절한 바 있었지만 군대 양성 시도를 이어갔다. 1893년 강화도에 창설한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이 존재한 배경이다.

 

일제에 해산당한 육군사관학교, 연무공원(鍊武公院)

고종은 해군에 앞서 근대식 육군 창설을 시도했다. 1888년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연무공원을 창설한다. 미국 출신 군사교관 4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무관을 천시하던 풍토 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4년 7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며 무장해제당했고 신식무기도 빼앗긴다. 형식적으로 존재하다 그 해 12월 17일 군무아문(軍務衙門)에 흡수되면서 폐지됐다.

 

고종, 근대식 해군사관학교 창설

유길준, 박영효 등 개화 사상가들은 고종에게 "개항장에 수영(水營)을 설치하고 외국인 교관을 데려와 군사를 철저히 훈련해야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고종은 1893년 3월 22일 해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 설치령을 공표했다. 1892년 12월에 영국 총영사에 해군교관 파견을 요청한 상태였다. 영국정부는 1893년 6월 해군 교관 파견을 승인한다.

1893년 9월, 강화도 갑곶나루에 해방학당이 문을 연다. 애초 15~20세 나이의 생도 50명, 수병 500명을 모집해 훈련시키려 했지만 실제 모집된 인원은 생도 38명, 수병 300여 명 정도였다. 본격적인 군사교육에 앞서 영어교육이 먼저 이뤄졌다. 윌리엄 듀플론 허치슨(W. du Flon Hutchison)이 영어를 가르쳤다.

이듬해인 1894년 4월부터는 영국대위 윌리엄 콜웰(William H. Callwell)이 군사학과 항해학을, 부사관 제임스 커티스(James Curtis)가 포술학을 담당했다. "그들은 상당히 총명해 보였고, 교련도 아주 빠르게 향상되었다" 생도들을 가르친 교관들이 남긴 평가다.

콜웰 대위의 교관 취임 수락 편지.
조선수사해방학당에서 근대식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모습.

 

 

일본의 염탐과 해방학당 해체

일본은 조선이 강화도에서 근대식 해군을 양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경계했다. 1894년 3월 2일 해군대위 미나미 요시요야(南義親)는 강화도를 찾은 후 건물 규모, 위치, 생도, 교육법, 해군력 규모를 자세하게 담은 첩보 문서를 작성한다.

군사교육이 시작된 지 3개월 후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했고 친일내각을 구성했다. 일본은 조선정부와 고위 관리를 압박해 영국교관 해고와 해방학당 해체를 요구했다. 결국 그 해 11월(일부 기록은 10월) 폐교된다. 

일본 해군대위 미나미 요시요야(南義親)가 강화도를 정탐하고 보고한 문서. 일본 방위성 사료관에 보관 중이다.

사관후보생 중 일부는 영어교사였던 윌리엄 듀플론 허치슨(W. du Flon Hutchison)을 따라 한성영어학교로 옮겨갔고 나머지 대부분 생도들은 육군으로 옮겨갔다. 1896년 5월, 영국 교관들이 귀국하며 최초의 근대식 해군사관학교였던 조선수사해방학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해방학당이 자리했던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61번지 일대는 현재 인천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통제영학당 건물 사진.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은 통상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관계약서 등 공식 문서는 '조선수사해방학당'으로 기록돼 있다. 그 외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 해군학당(海軍學堂) 등 명칭을 병행했다. 하지만 '통제영학당'으로 기록한 문서는 빈도수가 극히 적다. 공식문서에서 주로 사용한 '조선수사해방학당'으로 부르는 게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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