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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

조선의 외국어 교육기관, 동문학 간단요약

by 소벌도ㄹI 2021.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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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조선의 외국어 교육기관>

동문학(1883) - 육영공원(1886) -영어학교(1894) - 관립외국어학교(1895) - 조선교육령 공포 후 폐지(1911)


동문학(同文學)

1. 개요

1883년 8월 1일 첫 국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출발.
외국과 교섭이 늘어나면서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
중국의 동문관(同文館)을 본따 만듦. 동문관 영어학숙으로 출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구내에 설치.
동문학 학생들은 초,중등교육을 마친 15세 이상 양반자제들을 대상으로 수업함.
점심과 문구류 등을 포함해 학비 일체를 정부에서 부담.
운영비용은 해관의 관세 수입으로 충당함.

개화업무를 직접 담당할 수 있는 인재 양성에 역점을 두며 통역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기능.
교육기관으로서 동문학을 강조하기 위해 '동문학 영어학숙'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함.

1883년 8월 17일 동문학 부속기관으로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며 신문발행과 서적편찬 업무를 담당.
1883년 9월 20일,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郞)가 머무르던 저동(苧洞)에 한성순보 인쇄를 위한 박문국사무실 개소.
1883년 10월 30일 한성순보(漢城旬報) 제1호를 발행.
* 한성순보는 박문국에서 10일 간격으로 발행한 관보(官報)였음. 신문(한성순보)의 출현은 한반도 개화에 큰 역할을 함.

1886년 9월 23일, 청나라의 영향력을 벗어나고자 미국에 의뢰해 만든 육영공원(育英公院)이 문을 열면서 동문학 영어학숙 폐지.

 

2. 묄렌도르프(목인덕)의 기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는 독일 출신 언어학자 겸 외교관.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 한국이름 목인덕(穆麟德)

조선개화를 위한 교육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고 통역관 양성 필요성을 제기해 동문학 설치에 영향을 끼침.
조선해관 설립을 위한 차관교섭과 해관원 선발을 위해 중국을 방문.
귀국길에 동행한 중국인 당소이(唐紹怡)와 오중현 등이 동문학 조교로 일하며 양반 자제들에게 영어를 가르침.
당소이는 1873년 13세 나이로 미국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인물, 1881년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1882년 12월 묄렌도르프와 함께 조선으로 옴.
영국인 핼리팩스, 허치슨 등도 묄렌도르프와 함께 조선을 방문해 정착함.

"국민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남편은 부단히 노력했다. 1883년 봄, 그에 관한 기본방침이 완성되었다. 일천만 인구에 필요한 800개소의 초등학교, 84개소의 중등학교, 그리고 수도에는 자연과학 어학 및 공업을 위한 전문학교를 설립해야 했다."

묄렌도르프의 아내 로잘리(Rosalie von Möllendorff)의 자서전 中

묄렌도르프.

 

3. 관련 기록

"재동(齋洞)에 있던 외아문(外衙門) 학당에서 문을 열었는데 학생 수는 40여명 정도" 김윤식

동문학 어학생도 윤정식, 민상호, 윤시병이 각국 어학을 익히기 위해 상하이와 홍콩으로 떠났다. 「통서일기」, 1883년

"통상아문에서 동문학 영어학숙을 개설하고 생도를 모집했다, 작년 7월 영국인 해래백사(奚來百士)를 초빙하여 교사로 삼았는데, 일본어까지 통하는데다 학술도 있어, 교수방법이 좋아 생도들이 점점 발전일로에 있다. 현재 인원은 29명이고, 도강(都講)시에 우등생도 나왔다. 본 아문에서 반채(飯菜), 신수(薪水), 등촉(燈燭)을 대주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므로 한사람도 노는 사람이 없다. 지필묵은 생도 자신이 준비해야 하고, 교과서와 서양 종이와 필기구는 본 아문에서 준비하여 공급하므로, 주야로 공부에 열중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다. 교학규례는 생도를 반으로 나누어, 오전과 오후에 수업하고, 하루는 장어(長語)와 단어(短語), 문장해독과 변통하는 법을 가르치고 하루는 장어(長語)를 빼고, 단어(短語)와 서양 필산(筆算)을 가르치는데 날로 발전하고 있어 앞으로 여러 곳에 파견하여 견문을 넓힐 예정이다." 한성순보 제15호 국내사보(國內私報) ‘영어학도근황(英語學徒近況)’ 中, 1884년 3월 19일(고종 21년)

"동문학에서는 해마다 음력 6월과 12월에 시험을 보아 우수한 학도를 뽑는데 그 가운데 우등한 남궁억, 신락균, 권종린, 홍우관, 성익영, 김규희 등은 이미 관(官)에 임용되었고, 상무(商務) 교제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이철의, 유흥열, 이자연, 송달현 등은 전국(電局)에 파견하여 학습시키고 있는데, 모두 민첩하고 숙달하여 정식을 암용할 만하다." 한성주보(漢城週報) 제4호 동문학교 기사 中, 1886년 2월 22일(고종23년)

동문학, Royal College of Science and Languages로 소개. 홍콩현지 발행 「Chronicle & Directory」 中, 1884년 1월
동문학 소개 명칭 Government School로 변경. 홍콩현지 발행 「Chronicle & Directory」 中, 1887년 1월

1887년은 동문학 폐지, 육영공원 개원.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

 

4. 동문학 수학생 명단

3인. 윤정식, 민상호, 윤시병(1883년 10월 어학공부를 위해 중국행)

10인. 남궁억, 신락균, 권종린, 홍우관, 성익영, 김규희, 이철의, 유흥열, 이자연, 송달현(1885년까지 우등으로 졸업)

29인. 김장현, 권유섭, 오인택, 심노한, 이학인, 최영하, 유용인, 최국주, 김영섭, 김경하, 방경희, 이수영, 안화득, 박창성, 정최섭, 오범선, 최성대, 이치영, 윤인식, 이용규, 박진풍, 박진규, 한용경, 김규찬, 김연영, 박승조, 이진호, 정인학, 권재항(1886년 2월 당시 재학생)

총 42명 확인

동문학 우등생 출신 남궁억. 종로 탑골공원을 만든 인물이다. 무궁화 보급운동을 추진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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