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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드는 정보들

궁예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by 소벌도ㄹI 202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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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본명이다. 김궁예... 신라 왕족이었다. 신라 제47대 헌안왕 혹은 신라 제48대 경문왕 '서자'로 알려져 있다. 869년 즈음 태어났고 궁예 일대기 상48대 경문왕 서자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궁예가 태어날 때 무지개를 닮은 빛이 내렸고 치아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다고 한다. 이를 불길하게 여긴 일관(하늘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던 관리)이 왕에게 궁예를 죽이라고 청했다. 포대기에 궁예를 싼 후 높은 누대에서 던져 버린다.

누대 밑에 있던 유모가 떨어지는 궁예를 받아 목숨을 구했다. 이때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애꾸가 됐다. 유모는 도성에서 멀리 도망가 궁예를 길렀다고 한다. 유모와 함께 자라던 궁예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고 이후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이름을 선종(善宗)이라 칭했다.

신라 51대 진성여왕 재위 기간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진성여왕은 색욕에 빠져 나랏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당시 섭정을 맡았던 최치원은 진성여왕을 성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찌 됐든 혼란스러운 사회는 지방 호족이 자기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궁예 역시 강원도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한다. 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철원을 도읍으로 삼았다.

신라 하대 행정 구분과 당시 호족 분포. 출처 : 우용곡

 

철원에 남아있는 궁예 흔적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삼고 국호를 '태봉'으로 정했다.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뜻한다. 지금도 철원군에는 '태봉'이란 이름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태봉국 도읍 철원에는 궁예 궁궐터가 있다. 905년 지어진 궁구러은 918년 왕건이 궁예를 폐위시킬 때까지 사용했다. 궁궐 둘레는 외성 12.7 ㎞, 내성 7.7㎞이고 면적이 9500만㎡ 이르는 큰 규모였다고 전해진다. 거주인구는 최대 2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원 태봉국 도성터는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속해 있다. '정확히' 비무장지대에 속해 있다. 때문에 관련 사료조사를 못하는 상황이다. 

철원에 있는 태봉대교. 번지점프를 할 수 있다. @철원군
정확히 휴전선 일대에 걸쳐 있는 궁예도성터.
궁예도성 석등. 거대한 석등 규모는 궁궐터 규모가 거대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궁예가 남긴 흔적들

역사는 궁예를 미치광이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미복 차림으로 '도망'치던 중 해를 당해 죽었다, 폭정으로 미친 궁예가 민가를 떠돌다 백성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해 죽었다"는 묘사들이 주를 이룬다.

모두 승자가 남긴 기록이다. 권력이 기록은 독점하는 시대였다. 권력 밖 사람들은 구전과 이야기를 통해 다른 기록을 이어갔다. 궁예가 왕건에 맞서 끝까지 항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패자가 남긴 기록과 이야기는 아직도 지명에 스며있다.

한탄강, 궁예가 몰락을 한탄한 강?

궁예는 왕건에게 왕좌를 뺏기고 쫓기다 강가에 이른다. 강가 돌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한다. 궁예는 이를 보고 자기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한탄했다. 한탄강에 붙은 이름 '한탄'을 풀이하는 설이다. 철원에 있는 군탄리 역시 궁예와 휘하 군사들이 도망치며 한탄해 군탄리라고 한다. 민초들이 궁예에게 공감하지 않았다면 강 이름과 지역 이름이 '한탄, 군탄'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명성산, 궁예를 위해 슬피 울었다?

철원 뿐 아니라 포천에서도 궁예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산정호주 인근 명성산 역시 궁예와 관련 있다. 궁예 말년을 슬퍼한 산새가 울었다 해서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산 주변에는 궁예가 피신해 이름이 붙었다는 개적동굴, 왕건 군사를 살폈다는 망무봉 등 명성산 일대에서 궁예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역사를 놓고 대립했던 궁예와 왕건. 포악한 미치광이 폭군 궁예를 슬퍼하는 이름이 아직도 남아있다. 

 

궁예를 슬퍼했던 지명. 역사는 승자가 쓴 기록이다.

궁예가 세운 나라 첫 이름은 후고구려(고려)였다.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고려)에서 마진, 태봉으로 바꾼다. 궁예가 미륵을 자처하는 미치광이였기 때문에 국호를 자주 바꿨을까? 궁예를 몰아낸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했다. 그리고 나라를 세웠다. 궁예가 처음 세웠다는 이름 '고려'였다.

왕건은 고구려 후예를 자처하며 주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왕건을 주축으로 고구려 후예를 자처하는 세력과 궁예를 주축으로 하는 세력 간 대결. 궁예가 패했다. 산새는 슬피 울었고 아직도 궁예의 한탄이 지명에 새겨져 있다. 승자는 궁예를 미치광이 폭군으로 역사에 새겨 넣었다.군사분계선에 잠들어 있는 태봉국 성터가 발굴되면 진짜 궁예를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경기도 안성 칠장사 궁예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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