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한국 역사 속 인물들을 생각해보면 문관, 무관, 임금 등 떠오르는 이미지가 단조로운 편이다. 이 중 머리를 밀고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애꾸눈 궁예는 캐릭터가 단연 눈에 띈다.
배우 김영철이 대하 사극 '태조 왕건'에서 보여준 연기력도 궁예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근 20년이 다 돼가는 사극이지만 독특한 캐릭터와 배우 김영철 명연기가 어우러진 궁예는 여전히 온라인 상에서 밈(meme)으로 존재감을 이어나가고 있다.
궁예와 '관심법'
관심법은 궁예를 상징하는 스킬(?)이다. 극 중 궁예는 기침을 했다는 이유로 신하를 철퇴로 내리쳐 죽여 버린다. '관심법'으로 신하 머릿속을 꿰뚫어 본다. 신하가 역모를 꾸미는지 머릿속에 마군(魔軍)이가 가득한지도 한눈에 알아본다. 마군, 마구니는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뜻한다.
관심법은 심증만으로 상대방을 몰아 세우는 방법이다. 궁예는 자기 부인과 아들마저도 관심법으로 죽여 버린다. 기록에 따르면 왕후 강(康)씨가 궁예에게 조언하자 "네가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 있지 않느냐. 나는 관심법으로 보아서 다 알고 있다"며 왕후를 죽이고 두 아들마저 죽였다고 한다. 이어지는 폭정에 왕건을 중심으로 결탁한 지방호족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로 궁예를 몰아낸 왕건 세력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다. 궁예 폭정을 상징하는 관심법은 어떤 의미였을까?
관심법과 미치광이전략, 권력투쟁
정치외교학 용어 중 미치광이 전략(Method to the Madness)이 있다. 상대방에게 자기 행동이 충동적이며 비이성적이라고 믿게 만들어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다. 작은 일에도 발끈하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인상을 주어 정치외교적 폭을 넓히곤 한다. 궁예 관심법은 지방 호족세력과 권력다툼에서 우위를 잡기 위한 미치광이 전략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을 자처하며 한반도 서북부(현 강원도) 지역에서 세를 키웠다. 서북부를 장악한 궁예는 황해도 송악(개성)을 도읍 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901년이었다.
도읍을 정할 때 물길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지상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과거에 물길은 조세를 거두고 물자가 오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교통 인프라였다. 지금처럼 산을 뚫어 길을 낼 수 없었던 당시 지리적 조건은 터를 잡는데 결정적 요소였다. 물길을 끼고 있는 지역은 방어에도 유리하다. 한강 하구와 인접한 송악은 입지가 뛰어난 도읍이었다.
궁예는 905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다. 철원은 궁예가 초기에 세력을 키워나갔던 서북부 지역이다. 철원은 개성에 비해 물길이 열악한 지역이다. 한탄강을 품고 있긴 하지만 내륙 깊이 위치해 있었다. 한탄강은 지금도 급류를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강이다. 이런 물줄기를 뚫고 조세와 물품이 오가기는 쉽지 않았을 테다. 당시 철원은 개성보다 좋은 도읍지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악조건을 무릅쓰고 도읍을 옮긴 배경에 지역 호족세력과 권력투쟁이 있었다.
역사의 패자. 궁예는 정말 폭군이었을까?
궁예를 몰아낸 역사의 승자 왕건은 황해도 송악(개성)을 세력으로 둔 호족이었다. 지리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도읍을 옮긴 배경에 송악일대를 세력으로 한 호족세력과 긴장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궁예가 죽였다는 왕비 강씨 역시 황해도 신천 출신으로 왕건과 결탁한 호족 집안 딸이었다. 미치광이 전략이었던 관심법은 권력투쟁을 위한 수단이었다. 관심법은 호족세력을 견제하는 전략이었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마진'으로 고치고911년에는 국호를'태봉'으로 한번 더 바꾼다.국호를 바꾸고 도읍을 옮기는 일은 모두 정치적 쇄신을 위한 작업이다. 특히 도읍을 옮기는 일은 기존 사회 기득권과 크게 맞부딪히는 일이다. 지리적 약점을 감수하면서까지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겨갔던 배경이다.
국호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旦) 약자로 마하는 산스크리트어로 '크다'는 뜻이다. 진단은 중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 '동방의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국호 마진은 '대동방국'(大東方國)을 뜻한다. 태봉은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를 뜻한다.
궁예를 몰아낸 호족세력이 편찬한 역사서 《삼국사기》 및 《고려사》는 당연히 궁예를 미치광이 폭군으로 그리고 있다. 앞서 부인과 두 아들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묘사도 승자의 기록일 테다. 궁예가 폭정을 일삼은 폭군일수록 쿠데타는 정당성을 얻는다. 궁예는 정말 광기 서린 폭군이었을까? 불교를 구심점으로 영원한 평화가 깃든 동방의 제국을 꿈꾸었던 인물이었을까? 궁예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원도 철원은 휴전선이 지나가고 있어 연구가 힘든 상태다. 온라인에서 어느 역사인물보다 자주 접하는 궁예지만 우리는 아직 궁예를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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