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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효창운동장은 독보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by 소벌도ㄹI 2020.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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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운동장이 있는 효창동 일대는 조선왕릉이었다. 조선 22대 정조대왕 장자로 태어난 문효세자는 1786년 5월 다섯 살 나이로 명을 다한다. 문효세자 묘가 오늘날 효창공원에 '효창묘'라는 이름으로 마련됐다. 1786년 9월 문효세자 어머니 의빈 성씨가 연이어 숨을 다했고 문효세자와 함께 묻힌다. 1829년 4월 순조 후궁 숙의 박씨와 영온옹주가 효창묘 일대에 함께 안장된다. 효창묘로 불리던 이 곳은 1870년 4월(고종 7년) '효창원'으로 승격한다.

조선 후기 지도 <동여도>에 효창원이 ‘효창묘’로 표시돼 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용산 일대에 주둔한다. 일제 주둔 후 1921년, 대한민국에 첫 골프장이 조성됐다. 조선왕릉 효창원이었다. 조선왕릉 효창원은 우리나라 최초 골프장이 됐다. 일제는 왕릉을 코스 삼아 골프를 즐겼다. 1924년 골프장 폐장 후 효창원은 근린공원 기능을 하는 효창공원이 됐고 1944년 일본 궁내성 소속 이왕직은 효창원을 현재 위치인 서삼릉으로 이장한다.

효창원 골프장 전경 (출처: 『한국골프 100년 : 1900-2000』)

 

해방 후 조선왕릉이었던 효창원은 빈 터가 됐다. 백범 김구는 독립운동가 유해를 봉환해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삼의사 묘역에는 독립운동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가 자리했고, 임정요인 묘역에는 독립운동가 차리석, 이동녕, 조성환이 자리했다. 백범 자신 역시 명을 다한 후 효창공원에 묻혔다.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묘역도 이곳에 마련돼 있다.

암석과 토사가 퇴적돼 지층이 쌓이듯, 효창공원에는 '조선왕조(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 독립운동사(대한민국)'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 묘역. 왼쪽 비석 없이 마련된 묘는 안중근 의사 유해를 봉환할 수 안치할 자리다.
삼의사 묘역을 마련한 후 참배하고 있는 백범 김구(가운데).

해방 이후에도 효창은 '수난사'였다.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반공위령탑, 대한노인회 중앙회관, 고 육영수여사 경로송덕비,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관 등이 공원에 자리했다. 공원에 있는 원효대사 동상은 일본식 지명 '원정'과 '효창원' 앞글자를 각기 붙여 자리 잡았다고 한다.

효창운동장도 이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건립됐다. 1960년 제 2회 아시안컵을 개최하며 건립된 효창운동장은 독립운동가 묘역 일대에 지어져 논란이 컸다. 결국 경기장은 지어졌고 오늘에 이른다. 때문에 효창운동장을 축구 성지로 바라보는 시선과 폄훼 시설로 바라보는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 폄훼시설이든 축구성지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국내 경기장 중 민족 정체성을 효창운동장보다 강하게 품고 있는 경기장은 없다. 효창운동장은 민족을 상징할 수 있는 유일한 국내 경기장이다. 운동장이 자리한 땅의 역사가 그렇다.

효창운동장 뒤로 보이는 남산타워와 숙명여대 건물. 숙명여대 일대 역시 효창원 부지였다. 조선왕릉이었던 효창원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효창운동장 뒤로 이봉창 의사 동상이 보인다. 효창운동장은 그 자체로 논란이 있었지만 운동장 입지상 민족 정체성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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