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6월 정상에 오른 전경성축구단
전경성축구단은 기존에 있던 경성축구단, 평양축구단, 연희전문, 보성전문에서 실력이 뛰어난 선수를 모아 꾸린 팀이다.조선축구협회가 꾸린 팀으로 오늘 날 국가대표라고 볼 수도 있다. 1933년 창립돼 한국전쟁기간에 해산됐다고 알려져 있다.
전경성축구단과 관련해서는 일본 본토에서 열린 대회를 휩쓴 1935년 대표팀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 1935년 대회 참가를 위한 선수선발
1935년 일본은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전경성축구단은 조선지역대표로 참가한다.
조선일보 1935년 5월 17일 기사 <전일본종합축구(全日本綜合蹴球)에출장(出場)할조선대표(朝鮮代表)>는 당시 선수 구성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축구협회는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3일간 열리는 제1회 전일본종합축구대회에 출전할 조선대표팀을 편성하고자 15일 전형위원회를 열고 선수 17명을 선발하였다. 선수단은 경성운동장에서 맹훈련했고 오는 20일 경에 출정할 예정이다."
▲감독(監督) 정문기(鄭文基),이인규(李仁奎)
▲매니저(마네저) 권희창(權熙昌)
▲연습감독(練習監督) 김화집(金和集)
◇경성축구단(京城蹴球團)=이혜봉(李惠逢)GK),최성손(崔成孫)(LI)
◇평양축구단(平壤蹴球團)=강기순(康基錞)(CH),박형렬(朴炯烈)(RH),박인식(朴仁植)(LH),이정현(李正現)(RW),박의현(朴義鉉)(RI),김영근(金永根)(CF)
◇보성전문(普成專門)=박규정(朴奎禎)(RF),김용식(金容植)(CH),배종호(裴宗鎬)(RI),김병희(金炳禧)(LH),박효제(朴孝濟)(LW)
◇연희전문(延禧專門)=정용수(鄭龍洙)(LF),이봉호(李奉鎬)(RH),이유형(李裕瀅)(RH),김경한(金景漢)(LI)
▲후보(候補)=채금석(蔡金錫),김성간(金成玕),이정식(李貞植), 고홍관(高鴻寬)
오늘 날 월드컵 출전에 앞서 예비엔트리를 선발하고 자체 훈련을 통해 최종엔트리를 확정짓는 모습을 생각하면 되겠다.
2) 선수단을 꾸려 대회에 나서다.
조선일보 1935년 5월 17일 기사 <경축명일장도(京蹴明日壯途)에 전일본종합축구대회(全日本綜合蹴球大會)에출전(出戰)코저>는 대회에 나서는 선발 명단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경성축구단대표이사 배석환(裴奭煥)
▲조선축구협회대표 이인규(李仁奎), 권희창(權熙昌)
▲감독(監督) 현정주(玄正柱)
▲매니저(마네저) 이영선(李永善)
▲선수(選手)
이혜봉 李惠逢
정용수 鄭龍洙
박규정 朴奎貞
김용식 金容植
이봉호 李奉鎬
최성손 崔成孫
배종호 裴宗鎬
김경한 金景漢
김인석 金仁錫
이유형 李裕瀅
김병희 金炳禱
고홍관 高鴻寬
한갑석 韓甲錫
외삼인(外三人)
같은 기사는 "주장 이영민(李榮敏)은 실업야구 리그에 참가하고 있어 출장하지 못하고 채금석은 경기 중 부상을 입어 세전병원에서 입원치료로 참가하지 못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영민은 앞서 예비선수 소개에는 없었는데, 당시 기사에 보도된 내용과 실제 선발 명단 간에 차이가 조금 있는 듯 하다. 혹은 기사에 소개되지 않은 사정으로 인원이 바뀌었던가. 참고로 이영민은 고교 야구 대회에서 높은 타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이영민 타격상'의 그 이영민이다. 축구, 야구, 육상 등 다방면에서 운동능력이 뛰어났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채금석은 군산 출신 축구선수로 금석배 축구대회로 그의 업적이 이어져 오고 있다.
외삼인... 이 문제인데, 앞서 소개한 선수 명단을 참고하면 박효제(朴孝濟), 김성간(金成杆), 강기순(姜基淳)이 외삼인 인듯 하다. 외삼인이라고 기재한 이유는 의문이다. 기사를 보도할 여백이 모자랐다고 추정된다.
3)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참가하다.
일본은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성적을 토대로 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대표팀을 꾸릴 예정이었다. 당시 대회에 참가한 팀은 6팀이다.
도쿄 문리대학
훗카이도 국제대학
간사이대학클럽
센다이축구클럽
전경성축구단
나고야상업고등학교
전경성축구단과 나고야상업고등학교 간 승자가 바로 결승에 진출했고 다른 네 팀은 준결승을 거쳤다.
대회는 1935년 6월 1일~2일, 도쿄 메이지신궁경기장에서 열렸다.
3-1) 1차전 나고야 상업고등학교
전경성축구단과 나고야상업고등학교가 맞붙은 1차전 선발명단은 다음과 같다.
김경한 金景漢 LW
최성손 崔成孫 LI
강기순 康基錞 CF
배종호 裴宗鎬 RI
박효제 朴孝濟 RW
김병희 金炳禧 LH
김용식 金容植 CH
이유형 李裕瀅 RH
정용수 鄭龍洙 LF
박규정 朴奎禎 RF
이혜봉 李惠逢 GK
전경성축구단은 6:0으로 나고야상업고등학교를 대파하고 결승에 오른다.
3-2) 결승전 도쿄 문리대학
결승전 상대팀은 도쿄 문리대학이었다. 당시 선발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강기순 姜基淳 LW
최성손 崔成孫 LI
김성간 金成玕 CF
배종호 裵宗鎬 RI
박효제 朴孝濟 RW
김병희 金炳禧 LH
김용식 金容植 CH
이유형 李裕瀅 RH
정용수 鄭龍洙 LF
박규정 朴奎禎 RF
이혜봉 李惠逢 GK
【전반전 경성 3 : 1 문리】
【후반전 경성 3 : 0 문리】
종합스코어 6 : 1로 전경성축구단이 대승하며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조선일보는 당시 결승전 경기를 꽤나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1935년 6월 6일 <일본축구계(日本蹴球界)를정복경축우승(征服京蹴優勝)하기까지> 보도에 나온 결승전 장면은 다음과 같다.
내년 베를린 올림픽 선수 선발 기초가 될 중요한 경기! 경성축구단과 문리대학 결승전이 2일 오후 메이지신궁 경기장에서 있었다. 전경성축구단은 준결승전에서 나고야상업고등학교를 크게 이겼다. 문리대 역시 간사이대학클럽을 3:0으로 패배시킨 여세를 몰아 맞붙었다. 이에 경성과 대등하게 맞섰으나 경기가 이어지면서 실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6:1로 경성이 승리한다. 관중석 절반 가량이 조선인으로 채워져서 응원이 열렬했다.
3시 30분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강호 문리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처음부터 공세를 취했다. 프리킥을 허용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성이 실력을 발휘했고 7분에 김성간의 헤딩으로 선취 득점한다. 경기장 내 조선인 관중들이 크게 환호했다. 문리대는 진영을 정비해 만회골을 노렸다. 중원을 오가던 경기는 경성의 풀백이 비어있는 틈을 노려 하야시가 득점에 성공해 1:1 동점이 되었다.
경성은 공세를 몰아 18분 최성손이 골대 정면에서 득점 2:1, 21분에 박효제가 문전을 파고들다 골키퍼의 발에 안면 부상을 당하며 넘어졌으나 다시 경기에 임했다. 25분까지 문리대 골문 앞에서 경기가 이어졌으나 득점이 없었다. 30분 경 문리대가 경성 페널티에어리어까지 진출했으나 큰 소득이 없었다. 공방을 주고 받는 흐름의 경기는 44분 경성의 배종호가 드리블을 이어가 득점에 성공했고 3:1로 전반을 마쳤다.
문리대의 전술을 파악한 경성은 추가득점을 노렸고 중거리 슛을 시작으로 득점에 나섰다. 후반 1분 최성손이 골대 왼쪽에서 슛팅을 해 득점했고, 11분에 김성간이 추가 득점에 성공했다. 문리대 역시 분전했지만 전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다. 문리대는 18분에 득점을 노렸으나 실패했고 이후 수비에 치중해 추가 실점을 하지 않는 데 집중했다. 공격진들까지 후방으로 처져 공격에 소극적이었다. 경성은 중거리 슛 위주로 공격에 나섰다. 문리대가 틈을 노려 공격을 하기도 했으나 별 소득이 없었고 여전히 크게 밀린 채로 경기했다. 이후 박효제가 추가 득점해 6:1이라는 큰 점수차로 경기를 마무리, 경성의 실력을 입증했다.
경성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4) 팩트체크
4-1) 김경한 선수와 최성손 선수의 결승전 출전 여부.
결승전 선발명단과 관련해 김경한 선수와 최성손 선수 출전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조선일보는 최성손 선수가 출전했고 득점까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김경한 선수가 출전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 기록에서도 최성손 선수가 출전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4-2) 김영근, 이영민, 채금석 등 비교적 잘 알려진 선수들은 6월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국내에서 소개하고 있는 관련 내용들은 예비 엔트리 명단 전부를 소개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영민, 채금석은 6월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김영근과 관련해서는 더욱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는 베를린 올림픽 선수선발을 겸하고 있었다. 전경성축구단이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우승하면서 일본은 조선인을 대거 대표팀에 뽑아야 하는 꼴이 되었다. 당시 국내 축구계는 최소 5명은 대표팀에 선발될거라 생각했지만 일본은 '김용식'과 '김영근' 두 명을 대표팀에 선발했다.
대표팀에 선발 될 정도였다면 김영근의 활약상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는 당시 선수로 참가하지 않았고 경기 출전 기록도 확인할 수 없다. 일본은 같은 해 11월 있었던 '메이지신궁 경기대회'도 올림픽 선수 선발에 참고했다. 전경성축구단은 이 대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는데, 김영근은 이 대회에서 크게 활약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이지신궁 경기대회 선수 명단과 출전 기록 등은 확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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