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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한국의 근대를 만든 순간들13

개항기 영국의 대한정책 1. 큰 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관심사는 러시아 남진저지, 경제적 이익 추구(무역) 두 가지였다. 영국은 ‘무형(無形)의 제국’을 통해 이를 달성코자 했다. 가능한 식민통치 부담을 피하고 통상과 영향력 확대만 추구하는 정책기조로 다른 열강을 자극하지 않고 실질적 식민지화를 꾀하는 방법이다. 영국이 경제력, 수송력, 해군력에서 우위를 점했기에 가능했고, 한편으로는 인도 및 전 세계 각지에 분산돼 있는 영육 군을 더 이상 분산하지 않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청나라를 통해 러시아를 간접적으로 견제했고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자국 상인 및 기업에 대한 외교적 지원을 강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나라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은 청일전쟁(1894년) 이후 일본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2. .. 2021. 6. 7.
한국-영국 최초의 외교조약 체결전문 개요 한국과 영국이 근대식 외교관계를 처음으로 맺은 건 1882년 7월 20일(음력 6월 6일)이었다. 영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윌스(Willes)가 협상에 나서 '조미수호통상조약(윌스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동아시아 내 영향력과 교역에 불리하다고 판단해 비준을 거부했다. 다음해인 1883년 주일 영국공사, 주청 영국공사를 역임한 외교관 파크스(Parkes)가 재협상에 나섰다. 앞선 협상은 청의 알선을 받아 이뤄졌지만 이번에는 조선과 영국이 직접 협상에 나섰다. 조선측 전권대신 민영목 일행과 협상을 거쳐 10월 27일(음 9월 27일) 조미수호통상조약(파크스조약)이 다시 체결된다. 관세율 인하, 내지통상권 확보 등을 추가로 확보한, 영국의 이익을 대거 반영한 조약이었다. 한국(조선, 대.. 2021. 6. 1.
일본 시선에서 바라본 임오군란 맥락 초간단 정리 조선 군대의 습격을 받은 일본 공사 일행 1882년 구식군대가 일으킨 군란, 임오군란은 민 씨 일가의 부정부패와 신식군대(별기군)와 비교한 차별대우가 원인이었다. 봉기군의 칼날은 별기군 양성을 지원했던 일본으로 향했다. 민비는 별기군을 자기 경호부대로 둘 정도로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봉기군은 일본 공사관을 찾아가 포위, 공격한다.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공사관에 불을 질러 기밀서류를 태우며 가까스로 탈출, 인천으로 도망친다. 다음 날 오후 3시 무렵, 인천부사 정지용과 임시통역관 고영희는 제물포에 도착한 일본공사 일행을 환대하며 휴식처를 내준다. 한성 상황을 몰랐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일행을 쫓던 봉기군이 도착해 대원군의 밀명을 전달한다. 하나부사 일행을 척살하라는.. 2021. 5. 26.
구식군대 불만이 폭발하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발생과정 간단정리 직장에서 월급이 한 달만 밀려도 화가 난다. 그런데 13개월이 밀린다면? 13개월 만에 월급을 받았는데 현금이 아니라 컵라면, 김밥 등으로 지급받았다면? 회사를 뒤집어도 몇 번을 뒤집었을 테다. 1882년 6월(음력),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 이를 훗날 '임오군란'이라고 부르고 있다. 1876년 11월, 쇄국정책 기조를 펼치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한다. 이후 집권한 고종과 민비는 개화정책을 이어나갔다. 이에 개화파 관료가 득세했고 기존 수구 관료들은 세가 위축됐다. 고종과 민비는 개화정책 일환으로 1881년 군제를 개편한다. 기존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을 2영(무위영, 장어영)으로 개편한다. 몸이 튼튼한 지원자 80명을 뽑아 무위영 소속으로 별기군을 새롭게 창설했다. 별기군.. 2021.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