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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드는 정보들

[궁예 태봉국] 경기 강원 일대에 남아있는 궁예의 흔적들

by 소벌도ㄹI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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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누구나 종이와 펜으로 자기 생각을 남길 수 있다. 온라인 공간 안에서 자기 생각을 기록하기도 너무나 쉽다.
온라인 공간은 물론이고 종이와 펜도 귀했던 옛날 사람들은 구전으로 자기들 이야기를 남겨왔다. 강원도 서부와 경기도 북동부 일대에는 궁예와 관련한 지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궁예의 슬픔이 서린 명성산

명성산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과 경기도 포천시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 923m로 꽤 높은 축에 속하는 산이다. 명성산은 울 명(鳴) 자와 소리 성(聲)을 한자로 쓰고 있다. 우는 소리라는 뜻인데, 그 유래가 궁예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궁예는 휘하에 있던 왕건의 쿠데타로 인해 쫓겨난다. 이들은 명성산 일대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였고 수세에 몰 궁예 근왕병은 수세에 몰려 퇴로가 막히자 명성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를 본 궁예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산속 초목과 하늘을 날던 새들도 따라 울었다고 한다. 명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다.

물론 이 외에도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 김일이 나라를 잃은 뒤 명성산에서 크게 울고 나서 설악산과 금강산으로 향했다는 설, 가을 억새소리가 한 맺힌 울음소리 같다는 설도 존재한다.

명성산. 해발 900m가 넘는 높은 산이다.

명성산과 인접한 명소로 산정호수가 있다. 이 일대에 있는 '파주골'은 원래 '패주골'로 궁예가 패배해 쫓겨 도망쳤던 골짜기를 뜻한다고 한다. 또 명성산에 걸쳐 있는 '망무봉'과 '망봉산'은 궁예가 왕건 부대를 망봤던 곳이라고 하고 명성산 안에는 궁예 능선, 궁예봉 등 지명이 붙어있다고 한다.

만약 궁예가 극악무도한 군주여서 민심을 얻지 못했다면, 궁예와 관련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특히나 궁예의 패배를 슬퍼하는 쪽으로 붙은 이름들은 궁예가 역사에 기술된 것처럼, 마냥 패륜을 일삼는 폭군이었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명성산 일대.
산정호수는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 진 경기 북부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다.

패배를 한탄했다? 한탄강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역시 궁예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앞서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도망을 가던 중 이 강을 건너면서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졌다고 한다. 궁예는 원래 송악(개성)일대를 도읍으로 나를 세웠다. 송악 일대는 왕건으로 대표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지역이었고 궁예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철원으로 도읍을 옮긴다.

한탄강은 유속이 빠르고 수심도 깊기 때문에 조운과 사람이 오가기에 편리한 강이 아니다. 빠른 유속을 헤쳐 나가는 래프팅 명소 한탄강을 생각해보면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길로써 강이 가지는 약점을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궁에는 이 같은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도 도읍을 옮겼다. 지방 호족 세력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게 만든다.

유속이 빠르고 수심이 깊은 강의 특징이 '한탄'의 이름이라는 설명도 존재한다. 한탄강의 한은 '크다'는 뜻의 순 우리말이고 탄은 '큰 여울이 있는 강'을 뜻한다. 둘 중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여울이 있는 큰 강이라는 강 그 자체의 이름에 민초들이 남긴 궁예에 대한 기록이 함께 포개져 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한탄강의 빠른 유속은 도읍으로써 철원이 불리한 여건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칠장사는 궁예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라고 한다. 칠장사에는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 있다. 절 벽화에는 궁예를 그려 궁예를 기념하고 있다.

역사 속 궁예는 자기 부인을 살해하는 미치광이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궁예를 향해 사회 기득권이 남긴 기록과 민초들이 남긴 기록의 묘사가 다르다. 민초들 기록 중에도 비난을 위한 지명과 구전이 존재한다. 숙주나물이 대표적이다. 사육신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의 편에선 신숙주를 비판하는 민초들은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곤 했다. 녹두나물은 빨리 상하는 식물이다.

만약 궁예와 관련한 구전들이 역사 속 묘사와 일치한다면 궁예는 정말로 민심을 얻지 못해 쫓겨난 폭군이었을 테다. 종이와 펜도 없이, 구전으로 이어져 젼해져 온 기록들은 궁예의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궁예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경기 안성 '칠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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