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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만드는 정보들

[마라톤] 손기정 옆 일장기를 달고 서있던 마라토너

by 소벌도ㄹI 2020. 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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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마라토너 남승룡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마라토너 손기정이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식민지배를 받던 민족의 설움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트린 금메달이었다. 이후 발생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보여주듯이 손기정의 금메달은 일제 식민지배를 향한 저항의 아이콘처럼 소비됐다. 그가 올림픽 시상대에 올라섰던 모습은 지금도 교과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시상대 사진에 함께 서있는 동양 선수가 눈에 띈다. 그 역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있다. 손기정과 함께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마라토너 남승룡이다.

남승룡은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난 마라토너다. 1921년 생인 그는 육상에 소질을 보였고 양정고보를 거쳐 1927년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이후 1932년 전일본마라톤선수권, 1933년 극동선수권, 1934,1935년 일본건국기념 국제마라톤에서 연이어 우승했고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는 1위를 기록한다.

일본은 당시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 손기정은 대표팀에 선발해도 남승룡은 선발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선발전 1위를 한 선수를 탈락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대표팀에 선발된다. 마라톤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선수는 3명이었다. 그중 두 자리를 한국인 차지하는 걸 볼 수 없었던 일본은 현지에서 최종 선발전을 가진다는 명목으로 4명을 선발해 베를린으로 보낸다. 일본 선수 한 명이 탈락했고 남승룡과 손기정은 올림픽에 출전했고, 메달을 획득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손기정(가운데) 앞에 남승룡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승룡과 손기정은 해방 후 마라톤 보급회를 만들어 후학을 양성한다. 이때 발굴된 선수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서윤복이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이 처음 두각을 드러낸 경기는 1945년 10월 해방경축종합경기대회였다. 남승룡은 10마일 단축 마라톤 경기에서 2위를 기록한 서윤복에게 소질이 있으니 열심히 뛰어보라는 조언을 건넸고 청년 서윤복은 올림픽 영웅의 조언을 듣고 훈련에 몰두한다.

남승룡은 36살이라는 많은 나이에도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해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한국 마라톤을 이끌어 갈 서윤복을 위한 자신의 희생은 오히려 값진 보람이라는 생각이었다. 조력자 역할을 다했던 남승룡 역시 12위로 대회를 완주했고 그의 존재는 서윤복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밑거름이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후 백범 김구와 사진을 찍은 마라톤 선수들. 왼쪽부터 손기정 서윤복 김구 남승룡.
보스턴 마라톤 제패 후 헐리우드 배우와 사진을 찍었다.

 

보스턴 마라톤에 선수로 출전한 남승룡, 태극기를 달고 뛰겠다는 소망도 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아쉬움 때문이다. 남승룡은 손기정의 금메달보다 시상품 '월계나무'가 그렇게 부러웠다고 한다. 월계 나무로 가슴팍에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등이 아니었던 남승룡은 바지를 있는 힘껏 올려 입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1등이 아니었지만 한국 스포츠의 영웅이었던 남승룡. 순천에는 남승룡의 이름을 딴 길이 있으며 매년 남승룡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다. 

선수시절 남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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