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전쟁. 132년 간 이어진 식민지배의 종지부.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무려 132년 간.
1830년부터 이어진 식민지배는 1962년에나 끝났다.
독립을 위한 대가는 가혹했다.
1954년부터 8년 간 이어진 독립전쟁 동안 200만 명의 알제리 사람이 희생당했다.
참고로 그 당시 알제리 인구는 1000만 언저리였다.
프랑스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4 공화국이 무너지고 드 골이 5 공화국을 수립한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 본토와 같은 완전한 자국 땅이라고 생각했다.
"센 강은 파리를 가로지르고, 지중해는 프랑스를 가로지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튀지니, 모로코 등의 독립을 허용하면서도, 끝까지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던 곳이 알제리였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알제리 지역의 내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알제리 입장에서는 독립을 쟁취하는 일이었다.
확연한 입장차. 해서 전쟁 기간 내내 자신들이 겪는 일이 전쟁인지 아닌지 이름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알제리 전쟁이라는 표현은 독립 후에나 붙었다.
긴 역사, 핏빛으로 빛나고 있는 파리의 랜드마크
132년이라는 시간이 얽히고설킨, 프랑스와 알제리에 얽힌 이야기들이 참 많다.
1899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개최하며 파리에 거대한 철탑이 세워졌다.
에펠탑.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딴, 오늘날 파리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당시 에펠탑을 만들기 위한 재료 철을, 알제리에서 가져와 지었다.
파리의 에펠탑은 알제리가 있어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펠탑 인근에, 알제리 전쟁을 겪으며 희생당한 프랑스 인을 추모하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피에 누아르(Pied-Noir). 양쪽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 이방인
알제리에 정착한 유럽계 백인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프랑스군의 검은 부츠에서 왔다는 이야기와 알제리 농토를 개간하던 프랑스인들의 작업용 신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프랑스와 알제리의 관계가 엉망이 되면서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이 피에 누아르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세계적인 작가 알베르 카뮈다.
알제리 알제에서 태어난 카뮈는 프랑스계지만 아랍 문화 속에서 자랐다.
카뮈는 1960년 1월 사망한다. 한창 알제리 전쟁이 진행 중일 때였다.
대중은 카뮈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알제리인가 프랑스인가. 카뮈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서 알제리 독립을 반대했다. 비폭력, 인간애에 호소했다. 이도 저도 아닌 태도. 해서 프랑스와 알제리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알제리에 있던 카뮈는 모두 지워졌다. 문학적 성취를 기념하는 비석에 카뮈의 이름은 도려내 졌고, 알제리인들은 카뮈를 모르거나 혐오한다.
카뮈는 소설 '페스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페스트의 배경은 알제리의 '오랑'시다.
이 오랑 출신의 유명한 피에 누아르가 있었다. 패션 브랜드로 유명한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은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군에 징집된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적응하지 못한다. 동료 병사들과 트러블, 군 복무 스트레스로 고생하다 군 병원에 입원한다. 상태는 더욱 악화됐다. 약물중독으로 고생하던 그는 같은 해 11월 퇴원한다.
프랑스는 알제리 시민들을 무고하게 학살했다. 200만 명이라는 경악할만한 사망자 수가 가능한 이유다.
프랑스는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해서 알제리에 남아있던 유럽계, 피에 누아르들은 알제리 인들의 보복을 당해야 했다.
프랑스에도, 알제리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 경계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있었다. 축구계의 올타임 레전드. 지네딘 지단.
그의 부친은 친프랑스 민병대 아르키(Harki) 출신이라는 의혹을 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알제리계라는 이력 때문에, 프랑스 극우 정치인들에겐 늘 선동을 위한 도구로 쓰이곤 했다.
보수 정치인 장 마리 르펜은 "지단은 아랍계 백인이라 국가대표 자격이 없다"는 비난을 쏟아냈다. 그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 투표에 진출한다. 지단은 "르펜이 당선되면 대표팀을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르펜은 낙선한다.
세계적인 인물들의 개인사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오는 알제리 전쟁.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했지만 쿠데타가 발발하는 등 사회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한 전쟁"
"소련 등 국제적 지원을 등에 업고 일어난 반란"
프랑스에서는 역사적 해석으로 두고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8년 간 전쟁이 끝없이 이어지던 1960년대.
환멸을 느낀 당시의 청년들이 시대적 조류에 호응해 목소리를 낸다.
68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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